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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파크로스 뉴스] 예뻐야 사는 남자


 


[사진 김경록 기자·그래픽 이주호 기자]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생겼니

백설공주의 계모 왕비는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예쁜 존재가 있을까 늘 불안에 떨었습니다. 거울에게 물었죠.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요. ‘왕비님이 제일 예뻐요’라는 말을 들으면 안심했습니다. 2015년 대한민국에도 동화 속 왕비들이 많습니다. 여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회사에서 경쟁력을 잃을까, 이성에게 선택받지 못할까 불안한 한국의 남자들도 거울 앞에 섭니다. 화장품은 남자의 새로운 무기입니다. 외모도 경쟁력이라고, 외모 안 가꾸면 손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늘면서 한국 남자의 1인당 화장품 구매 비용은 세계 1위가 됐습니다. 江南通新이 200여 명의 남자들에게 어떤 화장품을 사용하는지, 왜 그런지 직접 물어봤습니다.


 



13.3개. 한국 남자들이 한 달 평균 사용하는 화장품의 개수다. 지난달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가 발표한 국내 화장품 소비자 사용실태 조사결과다. 영국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는 2014년 발표한 세계 화장품 시장 분석 보고서에서 한국 남성의 1인당 화장품 구매 비용이 세계 1위(25달러30센트)라고 밝혔다. 세계 남성 화장품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9%로 중국에 이어 2위였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한국 남성의 피부 관리 열풍을 소개하며 ‘한국 남자들 사이에 토너·로션·에센스 같은 기초 제품과 BB크림·눈썹연필 같은 메이크업 제품이 인기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외모나 피부에 신경 쓰는 게 여자들만의 일이라는 건 옛말이다. 요즘 한국 남자들은 부지런히 피부 관리를 하고 화장품도 많이 쓴다. 여성 못지않은 남성의 화장품 소비. 남자들은 얼마나 어떻게 화장품을 사용하고 있는지 강남통신이 직접 조사해 봤다.



▒ 스킨만 써도 괜찮다 싶지? 그럼 살아남지 못할 걸




1970~80년대 남성 화장품 광고. 위로부터 1970년 출시된 국내 최초 한국 남성 화장품 ‘비크멘스’, 74년 영화배우 남궁원이 모델로 나온 ‘바이스터’, 85년 신일룡이 광고한 ‘쾌남 루트’, 86년 당시 현역 축구선수였던 차범근을 모델로 했던 ‘피어리스 맨88’(사진 왼쪽), 최근의 남성 화장품 광고에는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 모델들이 등장한다. 위로부터 ‘당신의 남친을 나보다 더 멋지게’라고 말하는 ‘올리브영’ 광고 모델 김우빈, ‘라네즈 옴므’의 송재림, ‘잇츠스킨’ 여진구, ‘더샘’의 샤이니, ‘이니스프리’의 강균성(사진 오른쪽).

 

 

지난달 식약처가 발표한 남성의 사용 화장품 수 13.3개는 샴푸·린스 등 목욕 용품과 무스·왁스 등 헤어 용품, 몸에 바르는 보디로션 등을 모두 합친 수였다. 그렇다면 보통 화장품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얼굴용 화장품은 얼마나 되고, 또 무엇을 사용하고 있을까. 강남통신은 지난달 26일부터 일주일간 SNS, 휴대전화 문자, 설문을 통해 20~60대 남성 204명을 대상으로 남자들이 얼굴에 사용하는 화장품을 조사했다. 조사에 응한 남자들은 평균 4.8개의 화장품을 얼굴에 사용하고 있었다. 연령대별로는 20대가 평균 5.6개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다음으로는 30대 5.3개, 40대 4.1개, 50대 3.4개 순이었다. 평균 10명 중 3명은 5개 이상의 화장품을 매일 쓴다고 답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화장품은 로션(응답자의 81.4% 사용)과 스킨(78.4%)이었다. 폼 클렌징을 쓴다는 응답자도 전체의 절반 이상(50.5%)에 달했다. 10명 중 3~4명은 자외선 차단제(45.6%), 에센스(42.2%), 수분크림(32.4%)을 쓰고 있었다. 사용하는 화장품 종류는 연령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폼 클렌징의 경우 20대는 10명 중 7명이, 30대는 10명 중 6명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40·50대는 거의 쓰지 않았다. 30대 이상에서 자외선 차단제는 스킨·로션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화장품이었다. 화장대 위에 25개의 화장품을 갖춰 놓고 매일 11개의 화장품을 사용한다는 이도 있었다.



▒ “스킨·로션보다 더 좋은 게 있었잖아!”

 



아이크림이나 마스크팩을 쓴다고 답한 30~50대도 꽤 많았다. 응답자의 20%가 아이크림을 사용했다. 스킨 대신 에센스를 바르거나, 로션 대신 수분크림 등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명원(41·은평구 불광동)씨는 “에센스를 발랐더니 피부가 훨씬 촉촉하고 부드러워져 이젠 스킨을 안 쓰고 에센스를 바른다”며 “에센스 다음에 수분크림과 선크림을 바른다”고 말했다. 스킨과 로션만으로는 “뭔가 좀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올해 57세인 곽운영씨는 스킨·로션 외에 에센스와 자외선 차단제를 매일 챙겨 바른다. 외근이 많은 곽씨는 “피부 노화를 막는데 이것만 한 게 없다고 해서 바르게 됐다”며 “피부가 안 좋아 보이면 가끔 마스크팩도 한다”고 말했다.

남자들은 이제 색조 화장에도 적극적이다. BB크림, CC크림, 쿠션 팩트,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이들도 있었다. 눈썹연필로 인상을 또렷하게 만들고 연예인들이나 하는 줄 알았던 아이라이너도 쓴다. 건축기사인 황규현(30)씨는 매일 스킨, 아이크림, 탄력 에센스,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파우더로 마무리한다. “얼굴에 기름이 많이 도는 걸 싫어하는데 파우더를 바르니 오후가 돼도 얼굴이 보송보송해서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주말엔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아이라이너와 눈썹연필도 사용한다. 그는 “BB크림을 바르면 얼굴이 너무 허옇게 되는 것 같았다. 파운데이션을 발라봤더니 내 피부색과 잘 맞아 자연스럽고 좋았다”고 했다.

40대 직장인 김완준씨는 최근 자외선 차단제 대신 자외선 차단 효과가 있는 남성용 에어쿠션을 쓰기 시작했다. 김씨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면서도 손에 묻는 게 싫었다”며 “얼마전 아내가 스펀지로 바르는 콤팩트 제품을 사줘서 써봤는데 손에 안 묻고 얼굴색도 밝아 보여 매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남성 1인당 화장품 구매 비용 세계 1위

평균 4.8개 사용 … “자기만족” “이성 어필” 위해

5명 중 1명꼴로 마스크팩에 아이크림까지 써



▒ “좋은 피부, 남자에게도 경쟁력이 돼”




남자들이 이렇게 많은 화장품을 쓰며 피부 관리를 하는 이유는 뭘까. 강남통신 조사 결과 ‘자기만족’이란 답변이 63%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여성에게 어필하기 위해’(12%), ‘같은 남성 사이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10%)순이었다. 여성이 자신을 꾸미는 첫 번째 이유가 자기만족이라고 하는데 남성이 화장품을 쓰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범상규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좋은 피부는 이제 남자의 ‘매력 자본’이 됐다”고 말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모가 중요해지면서 투자한 만큼 개선 효과를 볼 수 있는 피부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는 것이다. 에센스·아이크림·수분크림·BB크림·마스크팩을 즐겨 쓴다는 40대 김대호(서대문구 홍제동)씨는 “이제 남자에게도 ‘피부 좋다’는 말은 칭찬이 됐다”며 “‘피부 좋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고, 그래서 더 가꾸게 된다”고 말했다. IT 회사에 다니는 박태우(33·서초구 서초동)씨는 “좋은 피부야말로 남녀 모두에게 호감을 준다고 생각한다”며 “좋은 피부가 경쟁력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 화장품 바르는 남자, 이젠 괜찮아




남자가 화장한다고 하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사회 분위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강남통신이 빅데이터 분석기관인 ‘타파크로스’에 의뢰해 지난해 5월 1일부터 1년간 트위터·블로그·카페·주요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 올라온 약 10억 건의 남성 뷰티 관련 정보를 모아 분석해봤다. 남성 화장품과 남성 뷰티에 대한 감성 키워드를 분석해본 결과, ‘매력적’ ‘좋은’ ‘깔끔한’ ‘멋진’ ‘성공적’ 같은 긍정적 이미지의 단어들이 85.8%를 차지했다. 부정적인 이미지의 단어들은 ‘싫은’ ‘실망스러운’ ‘최악인’ ‘과도한’ ‘난감한’ 등이었다.

제일기획이 지난해 실시한 ‘대한민국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성들 사이에서 외모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고 이를 위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남성들 사이에 ‘외모로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은 2009년 49.3%에서 지난해 70.1%로 높아졌다. 화장품을 고르는 남성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최가희 아이오페 대리는 “화장품 거리 홍보를 나가면 ‘한번 발라보라’는 권유를 받은 남성의 90% 이상이 다 응한다”며 “과거 여자친구 손에 이끌려서야 부스를 찾던 소극적인 남성의 모습과 다르다”고 전했다. 강남통신 설문에 응한 회사원 김완준씨는 “화장품을 살 때 광고나 입소문만을 믿지 않는다”며 “샘플을 얻어 발라보거나 지인의 화장품을 사용해보는 등 반드시 실제로 써보고 좋은 것을 산다”고 말했다.

 


여성이 추구하는 남성상 ‘마초→훈남’ 변화

남성 70% “외모로 호감 못 주면 손해본다”

피부 관리, 무한 경쟁 사회의 생존 전략이 돼



▒ “남성 화장품 시장, 여성 화장품 능가할 것”




사회생물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는 “머지않아 남성 화장품 시장이 여성 화장품 시장을 능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류를 포함한 모든 동물 세계에서 성에 관한 선택권은 암컷에게 있고 그러므로 수컷은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다윈의 성 선택론에 근거해 봤을 때,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면서 구태여 ‘강한 남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여성은 이제 힘이 세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남성보다 부드럽고 다정하며 외모가 매력적인 남성을 원하게 됐다”며 “남성은 이제 여성에게 선택받기 위해 외모를 꾸밀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새로운 남성상에 대해 『화장하는 남자가 시장을 바꾼다』의 저자 전양진 명지대 디자인학부 교수 역시 “다정다감하고 섬세하며 가정적인 동시에 자아도취적, 자기 성찰적인 특성을 갖는다”고 봤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경제활동에 적합하게 고착되어 있던 거칠고 성취 지향적인 남성의 모습에서 이제는 가정적이고 아름다운 남성이 새로운 남성상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달라진 남성상은 화장품 광고에도 잘 나타난다. 1970년 출시한 한국 첫 남성 화장품인 ‘비크멘스’는 말쑥한 정장 차림의 모델에 ‘굳은 신념과 꺾일 줄 모르는 용기가 당신의 자산입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적어넣었다. 70~80년대에 나온 ‘바이스터’와 ‘쾌남’의 모델은 선 굵은 배우 남궁원과 신일룡이 수염이나 근육질 몸매를 내세우며 마초적인 남성미를 강조했다. 최근 가수 강균성이 긴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닦스’(닦아쓰는 스킨)을 외치고, 날씬한 몸매의 배우 김우빈이 “이 정도면 됐다 싶지? 그럼 넌 아직 멀었다”라고 말하는 요즘의 광고와는 대조적이다.

취업난과 조기 퇴직 등으로 남성들의 외모 가꾸기 경쟁이 더욱 치열해 지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최 교수는 “청년들은 면접 전 쌍꺼풀 수술을 하고 기혼 남성은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그루밍(grooming)을 한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한민국 남성은 처절하게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있다”고 말했다.


글=윤경희·송정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그래픽=이주호 기자